“당신의 삶에 만족하십니까?”
서울 광화문광장에 나가 출근하는 시민들에게 물었다.
대답은 ‘매우 만족’ ‘약간 만족’ ‘보통’ ‘약간 불만족’‘매우 불만족’ 중 하나를 고르게 했다. 336명이 응답했는데, 1위는 ‘약간 만족’(100명), 2위는 ‘보통’(97명)으로 나왔다. 같은 실험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해봤다. 87명이 참가했고, 그 가운데 52명이 ‘매우 만족’이라고 답했다. 29명은 ‘약간 만족’. 6명을 제외하면 모두가 행복하다고 대답한 것이다.
행복에 대한 감수성
김진혁(46) 탁재형(37), 두 PD는 ‘행복해지는 법’(가제)이란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다. 두 사람은 프로덕션 ‘김진혁공작소’ 소속으로 그동안 굵직굵직한 해외 기획물 여러 편을 제작했다. 행복 다큐멘터리는 12월 TV 방영을 목표로 한 올해의 야심작.
이들은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상대로 인터뷰와 설문조사를 하고, 행복도가 높다는 나라들을 돌아보고, 행복학 전문가들도 만났다. 작업은 8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김진혁 PD는 “한국이 심각한 수준으로 불행하다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냐?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 거냐? 이런 의문들을 풀어보고자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국가별 행복도 조사를 보면 한국은 늘 최하위권을 맴돈다.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 행복학 연구의 권위자인 에드 디너(미국 일리노이대) 교수는 지난 8월 연세대 특강에서 “한국의 경제는 ‘경이적’으로 성공했지만, 한국인의 행복도는 ‘충격적’으로 낮다”고 말했다. 세계 130개국에서 갤럽 여론조사 자료를 수집해 진행한 그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의 행복도는 덴마크나 스웨덴 네덜란드의 절반 수준이고, 일본 미국 프랑스는 물론 멕시코나 헝가리보다도 낮다.
한국인의 행복도가 낮다는 건 누구나 아는 얘기지만, 누구도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행복은 개인적인 문제, 한가한 얘기 정도로 취급받고 있다. 과연 그럴까? 탁재형 PD는 외국에서 이뤄진 몇몇 연구 결과들을 보여준다.
“졸업앨범 사진에서 웃는 표정을 지은 학생들이 나중에 보니 더 성공하고 더 오래 살았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수녀원 연구’라는 것도 유명하다. 수녀들이 수녀원에 오면 왜 들어왔는지 보고서를 쓰는데, 긍정적인 단어나 문장을 많이 쓴 수녀가 더 오래 살았다는 것이다. 행복감은 건강과 장수는 물론 경제적 성공과도 연관된다는 게 학자들의 일치된 결론이다.”
서은국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몇 안 되는 행복학 전문가 중 한 명이다. 한국심리학회 행복지수개발팀장을 맡아 지난 8월 ‘한국인 맞춤형 행복지수’를 처음 선보이기도 했다. 서 교수는 “행복하면 기분은 좋겠지만 그게 사회적 관점에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질문할 수 있다”며 “그런데 수많은 연구 결과는 행복한 사람이 좋은 시민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고 말한다. 행복한 사람들이 생산성이 높고, 이직이 적고, 건강해서 건강보험료가 적게 나가고, 기부도 많이 한다는 것이다. 서 교수는 “미국이나 프랑스, 영국 등은 몇 년 전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행복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행복도를 올리는 일이 충분히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인은 왜 불행한가?
국가 간 행복도 조사를 보면 그 나라의 경제 수준과 행복도가 대체로 비슷하게 간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세계 가치관 조사’를 보면 한국의 행복도 순위는 중간쯤 된다. 그런데 이 같은 순위는 세계 10위권인 우리나라 경제 수준을 고려할 때 비정상적으로 낮은 것이다. 경제 수준에 걸맞은 행복감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분명한 것은 우리를 행복으로 데려다줄 거라고 그동안 믿어왔던 시나리오가 틀렸다는 점이다. 한국인을 지배해온 행복 시나리오는 사실상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해진다.
제작팀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성공한 사람들이라는 변호사 집단을 상대로 행복도 조사를 실시했다. 또 일반인 상대로 행복도 조사를 해서 행복도가 높은 사람들을 추려봤다. 성공과 행복도 사이에서 상관관계를 찾을 수 없었다는 게 이들의 결론이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한국이나 일본의 행복도가 매우 낮다는 사실 역시 경제력과 행복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된다.
서은국 교수는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이 분명 있다”고 인정한다. 먹고 살기도 힘든 사람들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이미 오래 전에 그 수준을 넘어섰다. 그는 “한국에서 행복은 물질의 문제를 넘어 심리의 문제가 됐다”면서 “다들 행복해지려고 돈을 번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행복을 잃어버리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고 진단한다.
낮은 행복감은 어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학생들도 심각하다. ‘돈이 많으면 행복해진다’의 학생판 버전인 ‘좋은 대학에 가면 행복해진다’는 한 가지 시나리오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의 고등학교. 한 반에 들어가 서울시내 대학교에 진학하고 싶은 사람 손 들어보라고 하니까 거의 대부분이 든다. 그런데 서울시내 대학교에 갈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안 된다. 기껏해야 10% 내외. 서울시내 대학교에 진학해야 행복하다는 한 가지 기준이 지배하는 교실에서 나머지 90%는 패자가 된다.
코펜하겐의 초등학교.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학교에서 논다. 1층은 거대한 실내 놀이터처럼 꾸며져 있다. 책을 읽는 애들은 있지만 공부하는 애들은 없다. 초등학교에 시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중3에 해당하는 초등 9학년이 돼야 진학 자료로 쓰기 위한 테스트를 한 차례 치를 뿐이다. 진학 외에 다른 길은 얼마든지 있다. 아이들 중에 패자는 없다.
탁재형 PD는 “행복을 최대화하는 방식이 아니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우리 사회가 짜여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행복해지는 법
행복하지 않은 사회라고 해도 그 속에는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제작진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몇몇 사람의 삶을 추적했다.
임익종(30)씨는 연세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대형 건설회사에 취직했다. 입시와 취업에 모두 성공한 경우라고 하겠다. 그런데 임씨의 직장생활은 길지 못했다. 회사 일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고, 싫은 일을 계속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힘들었다고 한다. 회사를 나와 백수생활을 하다 만화가로 새 삶을 시작했다. 만화는 오랫동안 그의 취미였다. 홍대 앞을 어슬렁거리며 만화를 그리고 원고료를 받아 사는 생활이 어느새 5년째. 김씨는 “건설회사에 계속 있었다면 지금의 행복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라며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 사람들이랑 어울리며 산다는 것, 내 하루하루를 내가 결정한다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오원근(43)씨는 1년 전 서울중앙지검 검사직을 내려놓았다. 자연과 유리된 도시생활에 대한 염증, 자신의 의지가 굴절될 수밖에 없는 조직생활의 피로 등이 이유가 됐다고 한다. 그 길로 고향인 청주로 내려와 변호사를 하면서 주말엔 농사를 짓는다. 가까운 미래에 시골 마을로 이주해 전업농이 될 생각이다. 오씨는 “검사 10년 하면서 낮에 하늘을 본 게 몇 번 안 된다. 청주만 해도 바로 옆에 흙이 있다. 바람을 느낄 수도 있고. 사람들 만나는 것도 훨씬 자유롭고 솔직해졌다. 내 판단과 내 의지대로 살아간다는 느낌, 그게 참 좋다”고 말한다.
대기업 공채를 포기하고 NGO를 만들어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펼치는 30대 여성,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면서 시를 쓰는 아저씨 등 인생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자기 인생을 자기 뜻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실감이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결국 행복해지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을 회복하는 일일지 모른다. 남들의 시선에서 풀려나 내 기준으로 삶과 가치관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순간, 행복은 가랑비처럼 서서히 적셔든다.
행복에 대한 모든 얘기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로 귀결된다. 탁재형 PD는 해답을 찾았을까.
“돈 생각, 남 생각 덜하면 된다. 우리가 취재한 결과가 그렇다.”
서은국 교수는 “행복해지는 가장 쉬운 방법은 친구를 만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제일 큰 행복감을 느낀다. 친한 사람들과 얘기하고 놀 때, 그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다. 행복을 위해 제일 많이 투자해야 하는 게 있다면 인간관계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