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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선물과 꿈의 씨앗

여행한사람 2007. 10. 29. 07:38

아버지의 선물과 꿈의 씨앗-인용글-소설가 엄광용의 사람의 향기

 

http://www.aromabooks.com/

최근 나는 고등학교 후배인 최병윤과 밤 산책을 자주한다. 그가 나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간혹 오다가다 마주친 적은 있지만, 서로 바쁜 관계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어본 적은 별로 없다.

전에 나는 건강 관리를 하기 위하여 10여 년 이상 새벽마다 수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5년 동안은 수영 대신 등산으로 종목을 바꾸었다. 내가 수영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수영을 배우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수영 인구가 부쩍 늘어 새벽에도 수영장이 무슨 돗데기 시장 같았다. 사람이 많으니 자연 물도 깨끗할 리 없고, 그러다 보니 소독약을 너무 많이 풀어 냄새가 지독하였다. 건강 관리를 한다고 수영을 하다가는 더 건강을 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5년 전부터 등산으로 종복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이젠 등산 인구도 많이 늘어나 휴일이면 북한산이 또한 돗데기 시장을 방불케 한다. 조용하게 산에 올라 자연과 대화를 나누며 사색을 하고 싶었지만, 도시에서 만나던 군상들을 산에 올라와서까지 만나는 느낌이어서 울큰 짜증이 나기까지 한다.

결국 작년부터는 등산도 잘 가지 않게 되었는데, 최근 후배 최병윤이 밤 산책을 권하였다. 아파트 근처에 밤 산책을 하기에 딱 좋은 코스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밤마다 산책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최병윤과 밤 산책을 다니면서 들은 이야기 중에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내 가슴을 울렸다. 그가 군대에서 제대한 후 복학할 때까지는 약 4개월의 기간이 남아 있었다고 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그에게 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복학하기 전에 세상 구경 좀 하거라."

봉투 안에는 유럽행 왕복 항공 티켓과 4개월간 마음대로 유럽 전역을 기차로 여행할 수 있는 유레일패스 승차권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건 4개월간 쓸 여비다. 아껴 쓰거라. 중간에 모자라더라도 더 이상은 줄 돈이 없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시 미화 3,000달러가 든 봉투를 내밀었다.

당시는 198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웬만한 사람들은 외국 여행을 엄두도 못낼 때였는데, 최병윤은 아버지 덕분에 학생 신분으로 4개월간의 외국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당시 3,000달러는 큰 돈이었다. 물론 그의 아버지가 그만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아들에게 '외국 여행'이란 선물을 줄 수 있었던 것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 선물은 그 돈의 가치로는 계산할 수 없을 만큼 대단히 값진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한창 상상력이 샘솟는 청년기에 외국 여행을 하면서 견문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최병윤은 유럽이 아니라 먼저 아프리카로 가서 후진국들을 두루 둘러보고, 석유로 돈을 번 중동과 고대문명의 발상지인 이집트 나일강을 거쳐 유럽의 선진 문명권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의 눈에 세계가 보였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 아프리카 미개 지역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리는 비참한 모습을 그는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 문명을 접하면서 이번에는 찬란한 문화의 유적들을 보며 충격을 느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세상은 이처럼 그 처한 지역과 나라에 따라 하늘과 땅의 간격만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최병윤이 구체적으로 어떤 꿈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다만 그의 꿈은 청년기에 4개월간 외국 여행을 하면서 느낀 '문명의 충격'이랄까, 아니면 '세계의 표정'을 통해 깨달은 그 무엇을 텃밭으로 해서 자라기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간혹 최병윤은 그의 집으로 나를 불러 조촐한 술 자리를 마련하곤 했다. 그의 집에는 책들이 많다. 정치, 역사, 인문, 철학, 문학 등 각 분야의 책이 적어도 1만 권은 된다. 명색이 글을 쓰는 나로서는 그 장서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나도 웬만큼 책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장서들을 보면서 기가 죽고 만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의 독서량이 대단하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정치는 물론이고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그가 폭넓은 내면 세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때 나는 그가 많은 책을 접하게 된 것이 청년기에 세계 여행을 하면서 키운 꿈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독서 편력은 꿈을 키우는 자양분이었던 것이다.

"외국 여행을 하면서 낯선 문화를 접하다 보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거기에 관한 책을 찾게 되고, 역사를 배우게 되고, 그 역사에 발자취는 남긴 사람들을 알게 된 것이지요."

최병윤은 졸업 후 한때 국회의원 보좌관을 지낸 적도 있고, 정치 광고 회사를 운영하면서 불쑥 영화 제작자로 나서서 '남부군'으로 대히트를 치기도 하였다. 그러더니 어느 날인가 광양으로 내려가 포스코와 관련한 업종인 두 개의 회사를 운영하는 기업가로 변신하였다. 어쩌면 도깨비 같은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최근에 최병윤은 다시 정치권으로 돌아왔다. 그는 멀리 우회를 해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고, 이제 그는 자신이 꿈을 심어놓은 텃밭을 본격적으로 경작하기 시작할 모양이다. 그러니까 그 우회는 자신의 텃밭을 경작하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외국 여행'이라는 아버지의 선물이 최병윤에게 큰 꿈을 심어준 것이다. 물론 아버지의 선물은 꿈의 씨앗으로 족하다. 그 씨앗을 텃밭에 심어 어떻게 가꾸어 훌륭하게 수확을 거두는가, 하는 일은 아들인 본인의 결단과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는 일이다.

아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선물, 그것이 아버지로서는 아들에 대한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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